재단소개

든든한 징검다리가 되겠습니다.

해남장학문화재단

재단소개
설립

설립

설립취지문

“나는 일제 식민지하(日帝 植民地下)의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일본(日本)에 건너와 어언 오십여 성상(五十余 星霜)을 이국(異國)땅에서 살아왔다. 그러나 올해 내 나이 고희(古稀)를 맞이하면서도 한 시도 나를 태어나게 한 고향산천(故鄕山川)과 이웃들을 잊어 본 적이 없다.

다행(多幸)히 그동안 약간(若干)의 재물(財物)도 생겨 낙엽귀근(落葉歸根)의 심정(心情)으로 마산(馬山)에 소유(所有)한 땅과 약간(若干)의 금액(金額)을 보은(報恩)의 징표(徵表)로 고향(故鄕)에 환원(還元) 희사(喜捨)하기로 결심(決心)하였다.

이것으로 내 가난과 못 배움의 한(恨)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고 고향(故鄕)에서 자라나는 세대(世代)에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(以上) 바랄 것이 없겠다.“

설립자 프로필

海南獎學文化財團 出捐者 프로필
  • 성 명 : 조 성 제(趙盛濟) 아호(雅號) : 해남(海南)
    생년월일 : 1926년 9월 17일생
    본 적 :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 (慶南 咸安郡 漆西面 會山里 會文)

    선생께서는 일제(日帝) 식민지하(植民地下)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가난과 못 배운 한(恨)을 풀기 위해 17세의 나이로 현해탄(玄海灘)을 건너 일본(日本)으로 갔다.

    일본에서의 첫 직장(職場)이 탄광 광부(炭鑛 鑛夫)였으나 자신(自身)이 일평생(一平生) 해야 할 천직(天職)이 아님을 깨닫고 취업(就業) 3일 만에 가족(家族)을 남겨둔 채 단신(單身) 동경(東京)으로 와서 주야(晝夜)로 행상(行商), 잡화상(雜貨商), 막노동(막勞動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야간(夜間)에는 역 대합실(驛待合室)에서 노숙(露宿)하는 등 20여 년간의 이루 혜 아릴 수 없는 고생(苦生) 끝에 약간의 재물(財物)을 모았다. 경제적(經濟的)으로 안정(安靜)되기 전에는 고기 한 점, 술 한 잔, 담배 한 개비도 하지 않고 오로지 절약(節約)과 근면(勤勉)으로 성실(誠實)하게 생활(生活)하셨다.

    이와 같이 검소(儉素)한 생활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게 되어 고희(古稀)를 맞아 한시도 태어난 고향산천(故鄕山川)과 이웃을 잊을 수 없어 고향에서 자라나는 세대(世代)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뜻 깊고 감격(感激)스런 장학재단(獎學財團)을 創立)창립하기에 이르렀다.

  • 1970년 10월 13일 가나가와현 오다하라시 및 동년 12월 20일 오까야마현 구라시끼시에 동성상사를 설립
  • 1975년 4월 10일 동경도 태동구에 동신상사를 설립
  • 1977년 10월 6일 사이타마현 오께가와시에 또 하나의 동성상사를 설립
  • 1981년 9월 1일 지바현 이찌하라시에 임해흥업주식회사를 설립
  • 1984년 5월 10일 동경도 시나가와구에 동성상사주식회사를 설립
  • 1996년 2월 29일 재단법인 해남장학문화재단 설립
  • 2018년 5월 01일 93세에 타계, 東京都大田區池上本門寺理鏡院 안장
  • 재일교포이시고 칠서 회문리 출신의 해남선생께서 고희(70세)를 맞아 조일제 전 국회의원께 30억 상당을 희사 하시겠다는 뜻을 밝힘. - 1995년 11월 30일 공익법인설립을 위한 발기인 총회가 짐(17명 참석)
    - 대표발기인에 조일제 전 국회의원 추대.
    - 법인의 명칭, 정관제정, 이사 구성 등을 대표발기인에 위임키로 함
  • 1995년 12월 13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첫 이사회 개최
  • 명칭을 출연자의 아호를 따 해남장학문화재단으로 결정.
  • 출연금을 현금 10억원과 마산시 소재 대지 700평으로 하고 대지가 매각되면 증자키로 함.
  • 1996년 2월 29일 장학재단 설립 허가(경상남도교육청 제17-80호)
  • 1996년 5월 25일 창립 기념식
  • 1996년 10월 28일 아라가야 학술토론회 개최.